Memento (A)Mori: 종이 테이프, 형광등, 당신과 나――2025.8.24 BJW 아이치 대회

(2025년 8월 28일 현재, AKIRA의 트위터 바이오에는 Memento Amori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생채기도 머지않아 완치될 줄 믿소. 굿바이.

이상, 『날개 』

“아키라, 안녕하세요. 지금 테이블 접고 계신가요?”

ENTRIO 스포츠 아레나, 오후 3시 59분경. 아니, 어쩌면 오후 네 시 정각 정도. 나는 계절에 안 맞는 옷을 입고 36도에 육박하는 아이치현의 더위를 헤치고 십오 분을 걸어서 엉망이 된 채, 마치 내가 레슬러라도 된 것마냥 숨을 몰아쉬며 대뜸 그렇게 말했다.

반라 차림으로 테이블 앞에 서서 굿즈를 만지작거리던 아키라(AKIRA)는 나를 돌아보고는, 듣는 쪽으로 하여금 영화의 슬로우 모션 장면 속에 떨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 지금 막 펼치고 있었어요.”

“헉,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깐만요.”

“천천히 하셔도 괜찮아요.”

나는 주섬주섬 비어있는 근처의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시작은 원대했으나 끝에 가서는 의자도 없는 세븐일레븐의 커피머신용 테이블에서 직원 눈치를 보며 휘갈긴 통에 용두사미가 된 편지를 급하게 봉투에 넣어 봉하고,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고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가져오지를 않았으면서) 가볍게 앞머리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총총 아키라에게로 돌아갔다.

그새, 테이블에는 이벤트 개시 시간인 네 시를 진즉에 넘겼는데도 한가하게 아키라의 사진을 사고 싸인을 받는 아저씨가 있었다. 뒤에서 대충 들어보니, 나랑 똑같이 오사카에서 왔다는 모양이다. 왠지 친근감이 들어서, (그리고 오사카 사람들은 원래 생판 모르는 남한테 말을 잘 걸기 때문에) 핸드폰 셀카로 투샷을 남기려던 아저씨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었다.

“사진 제가 찍어드릴까요?”

역시 오사카 아저씨랄지, 거절하지 않았다. 가로가 좋으세요 세로가 좋으세요? 하니 세로가 좋으시단다. 전신이 나오게 찍어드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저씨를 치운 나는, 다시 가방에서 편지를 꺼내어 들고 아키라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휴식시간이나 경기 후에도 물판 나오시나요?”

“그럼요.”

“그럼 숨 좀 가다듬고 나중에 다시 올게요. 지금은 이것만 받아주세요.”

아키라에게 편지를 건넨다. 아키라는 웃으며 고맙다고 했던가. 나는 내심 그가 언제 그것을 읽게 될지 궁금해했다. 이전에는, 직접 건네는 것도 아닌 ‘선수 전달물 박스’에 넣어두면 나중에 스태프가 전달하는 형태의 선물을 했는데 그로부터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휴식시간에 “편지 잘 받았어!” 하고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편지를 건넨 경기가 아닌 그 다음 경기에서야 “네 편지, 감동했어” 라고 들은 적도 있었다.

아키라는 문득 자기 어깨의 타투를 가리키며 나를 향해 웃었다.

“같네요.”

내 옷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지난 수 년간은 입지 않은 채 옷장에 보관했던 한냐멘 프린트의 원피스. 한냐멘을 좋아해서 어깨에 타투까지 놓은 아키라를 위해 계절에도 맞지 않는데 입고 온 것이었다. 자랑하는 걸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키라가 먼저 발견해주어서 마냥 기뻤다.

“일부러 맞춰서 입고 온 거예요! … 오늘 경기도 기대하고 있어요. 트위터에서 봤어요, 낚시 바늘. 전 벌써 낚인 것 같아요.”

“다른 것도 더 있어요. 그 경기에서 나올 바보 같은 건 다 제 아이디어니까, 기대해요.”

그러는 동안 에도 경기가 시작한다는 안내방송은 계속 진행되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경기 시간 중에 선수와 이야기하는 것이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을 보는 여자들 사이에서는 팽배한 예의나 암묵의 규칙 같은 것에 위반되지 않을까 걱정된 나머지,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숨이 가쁘고 더워서 나는 “아, 가봐야겠어요. 다시 올게요!” 하고 아키라를 등지고 경기장을 향했다.

아키라는 테이블에서 멀어지는 나를 향해 손키스를 날렸고, (손키스, 라는 귀여운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주 오랜만에 상기한) 나는 그에게 키스를 되돌려주고 경기장 문을 열었다.

나는 서쪽 링사이드 관객석 마지막 열의 가운데 즈음인 4번 자리에 앉았고, 그 자리에선 선수의 입장곡이 흐름과 동시에 로퍼를 끌며 걷는 발소리가 들렸다. 내가 관전하는 프로레슬링 단체 중, 대일본 프로레슬링(BJW)은 유일하게 지금까지도 입장하는 선수에게 종이 테이프 (리본) 던지기를 허용하는 단체다. 그 손님이 어떤 좌석을 구매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선수가 입장하기 직전이면 늘 분주하게 로퍼를 끄는 소리를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나는 종이 테이프를 가져온 그 손님이 부러웠다. 종이 테이프를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한 번 들기는 했는데, 평소에 종이 테이프를 챙겨버릇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엔 완전히 까먹고 말았다. 그리고 어떤 기회나 어떤 순간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한 번 던져버린 테이프가 다시는 같은 궤적을 그리지 않듯이.

대일본 프로레스라는 단체는 이를테면, 두가지 젠더를 내세우는 것이 특징이다. 스트롱 스타일, 혹은/그리고 데스매치. 젠더가 그렇듯 그 두가지는 병행되기도 하고 서로 뒤섞이기도 한다. 그런 이유에서, ‘젠더’는 대일본 프로레스에 존재하는 두가지 ‘스타일’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비유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데스매치를 보기 위해 BJW를 찾았다. 그리고 실제로 현장에 갔던 총 세 번 중 가장 최근의 두 번은, 특히 아키라를 보기 위해서였다.

일본 데스매치의 전주는 역시 파이프 오르간이다.

각종 장치나 도구가 사용되는 데스매치는 경기를 시작하기 전, 링을 셋팅하고 준비하는 시간을 요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어쩐지 일본 데스매치(라고는 해도, 내가 경험한 것은 DDT와 BJW 두가지 뿐이지만)에서는 곧잘 이때 파이프 오르간이 들어간 음악을 틀어준다. 오르간 연주를 배경으로, 압정이나 철선, 형광등 따위를 링에 올리고 배치하는 스태프. 분주함과 경건함. 경기장 에어컨이 빵빵했던 탓에 괜히 더 떨렸다.

이윽고 링 어나운서가 “BJW에서においての 데스매치”가 시작된다고 공지한다. 생략형이 아닌 방식으로는 잘 쓰이지 않는 문법이다.

그리고 파이프 오르간이 멎고, 선수 입장곡이 흐르고 (축제다 축제. 신나는 곡조에 신나는 가사다), 이토 유사쿠가 철선을 휘감은 커다란 나무 판자를 십자가처럼 이고 들어온다.

반대편에서 아키라가 입장하지만 내가 앉은 자리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카메라를 치켜들고, (운 좋게도, 뭘 해도 시야를 방해당하는 뒷자리가 없는 좌석이었다) 렌즈와 두 눈 중 어느쪽을 선택해야 할지 내내 망설였다.

나무 꼬치를 잔뜩 꽂은 스티로폼 블록을 안고 링에 들어온 아키라는, 처음 나에게 대답해주었을 때처럼 차분하고 정성스러운 속도와 움직임으로 그것을 링 구석에 내려놓고 가운을 벗었다.

분홍색, 빨간색 종이 테이프를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그게 나였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나에게도 테이프가 없었다.

과연 〈주간 프로레스〉 인터뷰에서 강해지기 위해 킥복싱을 배웠다고 하는 프로레슬러답게, 묵직한 킥과 챱, 엘보우의 시퀀스에 리듬감이 있다. 파워풀하면서도, 절제된, 그런 스토익함은 선수의 트위터 계정 염탐만으로도 익히 알고 있었던 아키라의 속성들이다. 그런 아키라조차 미처 비닐 포장을 미리 뜯어두지 않은 나무 꼬치가 생각보다 뜯기지 않아서 당황하는 모습은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십자가 타투를 새긴 손가락으로 나무 꼬치를 쥔 아키라가 이토 유사쿠의 손바닥을 뾰족한 쪽으로 내리꽂았다. 장외 난투가 계속되고, 아키라는 관객석을 향해 꼬치를 던지거나 관객을 장난스레 협박하기도 한다. 나는, 1열에 앉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다가도, 만약 그랬다면 옆자리의 시끄러운 오사카 아저씨와 두런두런 떠드는 경험을 하지 못했겠지, 라고도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키라가 잘 안 보였다. 없는 형편에 가장 싼 자리보다 1000엔 더 줬는데도, 링사이드의 서너번째 열이니 객관적으로 링에서 가까운 자리였는데도. 1열이었으면, 아니면 차라리 더 멀리에서, 위에서 내려다보았으면 아키라가 전부 보였을 터. 그럼에도 뭔가 남기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카메라를 들었고, 장외 바우트가 계속되며 철선 보드가 코앞에서 지나갔던 것 같은데도 나는 차라리 카메라 초점 잡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키라와 이토가 계속 서로를 향해 물건을 던졌고, 의자에 맞은 아키라는 의자를 껴안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얼굴에서 어느새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언제부터, 무엇에 맞아서 피를 흘리기 시작했는지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좋아하는 요소 중 하나는, 코너 포스트의 맨 꼭대기에 올라서 달을 그리듯이 떨어지는 ‘문설트’라는 행위다.

아키라와 이토는 어느새 코너 포스트 위에 있었고, 아키라는 이토를 껴안고, 눈 깜짝할 새 사선으로 낙하했다. 그것은 ‘문설트’나 ‘스플래시’가 가진 선언적인 특성이 없는, 순간적인 움직임이었다.

‘쿵’ 소리가 났지만, 아키라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반대편의 1열의, 과거의 나와 같은 헤어스타일을 한 관객의 시선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기에, 그 시선의 끝에 아키라가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숨죽이고 있자, 서서히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아키라가 무릎을 끌며 기어 나왔다. 일어선 아키라는 박수를 요구했고, 나는 거기에 부응하기 위해 카메라와 메모장을 양쪽 다 내려놓았다.
링 캔버스에 무언가 쏟아졌고, “아파” 하고, “거짓말이지” 하고 앞줄의 관객들이 얇은 목소리로 웅성거리고 있었다. 아마 아키라가 트위터에 올렸던 낚시바늘일 터였다. 이토 유사쿠는 철선 보드를 들고 아키라를 향해 달려들었고, 눈을 까뒤집은 아키라는 마침내 최고조로 달아오른 듯 보였다. 스노우볼을 흔든 것처럼 소금이 쏟아졌고, ‘오징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토는 아키라의 얼굴에 먹물을 내뿜었다. 아키라는 이렇게 될 줄 알고서 이 경기를 “언더 더 씨 데스매치”라고 이름붙였던 것이다.

쓰리 카운트는 아키라를 핀한 이토가 땄다.

나는 계속 아키라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새로운 챔피언의 탄생에 박수도 치지 않고 내내 아키라를 바라본 탓에 그는 소금 기둥이 되어 사라져야 했던 걸까.

입장 커튼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그는 아주 오랫동안 손을 흔들고 있었고, 그의 몸이 반대쪽 커튼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가 이토를 향해 인사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키라는 계속 손을 흔들었고, 나는 문득 그게 더 넓고 깊은 무언가,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를 향한 작별인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쩐지 그런 직감이 들었다.

메인 이벤트가 끝난 뒤에는 스페셜 싱글 매치가 있었다. 아키라와 이토 유사쿠가 둘이서 만든 난장판을 치우는 데에는 대여섯 사람의 협력이 들었다. 마침내 바닥을 다 치운 선수들과 스태프는 형광등을 한가득 가져와서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장식을 다는 것처럼 한 번에 하나씩 정성껏 고무줄로 매듭을 만들어 링에 매달았다. 사각형 링의 마주보는 두 변을 전부 형광등으로 채우는 데에는 또 한참이 걸렸다.

“형광등 뒤집어써 본 적 있어?”

지켜보던 나에게 옆자리의 오사카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아니요, 전 아직 그렇게까지 가까이서 본 적은 없는데요. 혹시 뒤집어써 본 적 있으세요?“

“있지. 오니타 아츠시라고 알아?”

그런 말이 오가는 사이에, 마침내 링에 올라온 두 선수. 나는 영영 아키라를 생각하느라 다음 경기 같은 것은 집중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하니 스기우라 선수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부터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스태프에게 비닐 우의를 받은 것은 첫번째 줄에 앉아있는 관객들 뿐이었는데, 경기가 고조되며 깨진 유리 파편은 내가 있는 열까지도 날아들었다. 한 번은 커다란 조각이 옆자리 아저씨와 나의 얼굴 사이를 위태롭게 휙 지나가기도 했다. 아저씨는 “크으, 방금 엄청난 게 보였는데!” 하고 신나 보였다. 나는 그 다음부터는 형광등이 내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기만 해도 곧 그게 깨져서 이쪽으로 날아올 것만 같아져서, 몸을 움찔움찔거리거나 부산스럽게 웅크리면서 남은 경기를 봐야 했다. 형광등이 깨질 때마다 스튜디오의 스모그 머신처럼 멋스럽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아마 사실 수은일 테다. 형광등 데스매치를 본다는 건, 선수와 함께 수은에 중독되고 날아드는 유리 파편을 감당하는 일이다. 그것은 뭐랄까, 위험한 나머지 즐겁다. 데스매치는 어쩌면 내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오늘을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유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데스매치가 끝나면, 반드시 내일이 온다. 그래서 다음 데스매치가 또 시작될 수 있다.

스페셜 싱글 매치는, 그런 형광등 데스매치의 재미에 관해서는 경지에 오른 듯 보이는 스기우라 선수의 승리로 끝났다. 패배한 미치요 선수가 링을 빠져나가고, 혼자 남은 스기우라는 단체의 사람도 아닌 자기가 행사를 끝맺을 수는 없다며 아키라를 꺾고 새로이 데스매치 챔피언으로 등극한 이토를 링 위로 불러냈다. 둘은 마지막 시합에서 못 쓰고 남은 형광등이 못내 아쉽다고, 경기가 끝났으니 형광등을 깨면 유리가 부서질 뿐인 일인데도, 결국 가져온 형광등이 바닥날 때까지 형광등 위로 몸을 던지는 퍼포먼스를 즐겁다는 듯 반복했다.

대회 끝난 뒤 사인회의 아키라는 단정하게 피를 닦고, 검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데스매치 레슬러들은, 경기를 치룬 뒤에는 곧잘 피투성이인 상태로 사인회와 기념 촬영회에 나타나곤 한다.) 줄을 서고 기다리는 내 앞에서, (그날의 관객 중 유일하게) 아키라 티셔츠를 입은 팬이 아키라와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고 있었다. 작별인사로 아키라가 그를 가볍게 껴안았고, 질투심이 많은 나는 다정하고 매력적이고 키가 큰데다 강한 레슬러인 아키라가 부러워졌으면서도, 두사람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내가 질투한 다정한 눈빛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언젠가 다시 오면 또 봐요, 뭐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미국과 일본 정도 되는 거리에서 ‘언젠가’가 좀처럼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의례적인 인사인 동시에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마치 말하면 이루어질 것처럼, 주문을 외듯이.

돌아온 대답은 여기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 사무라이니까 두말 하지 않아요.”

그것은 거절이었지만, 나는 거절만이 가질 수 있는 진실성에 감동했다. 일본에서의 재회를 거절당한 나는 “그러면 한국에서 봐요.” 하고 주장했다. 아키라는 한국에는 다시 가겠다고 했다.

“이번에 비행기 환승 때문에 다섯 시간동안 서울에 있었는데, 서울은 아름다웠죠.”

아키라는 호주에 들렀다가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이제 더는 긴 비행기 환승을 버틸 수 없게 되었다며 비행시간이 짧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갈 교통비를 빼면 돈을 조금이라도 더 쓸 수 있을지, 지폐를 세어 본 나는 다시 아키라의 사인회에 줄을 섰고, 뒤에는 더 이상 아무도 줄을 서지 않아서 내가 마지막이었다. 사진이 인쇄된 종이 카드를 사고, 사인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셀카 모드로, 셔터는 아키라가 눌렀다.

“다들 저를 킹 오브 팬서비스라고 부르는 데에 다 이유가 있죠.”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전부 ‘인생샷’이었다.)

우리는 조금 더 이야기했다. 아키라는 내내 투명한 연갈색 눈으로 똑바로 마주보며, 가라앉았지만 또박또박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문득 아키라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쪼그려 앉아 아키라와 시선을 맞추었다. 아키라는 여러 가지를 말해주었다.

데스매치라는 장르에는 한 획을 그었다 (사실이다), 피를 흘리는 건 즐겁지만 데스매치는 이제 즐겁지 않으니 그만두고자 한다. 그걸 경기가 끝나자마자 말해도 될지 고민했지만 당신의 편지를 읽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야 여기서 당신을 만났는데 여기서 보는 건 마지막이 되겠네요. 당신이 오사카에 왔을 때, 그때 당신을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너무 엉망이 되어서 나올 수가 없다고 폰도가 말해줬었어요.”

“그런 경기 때문에 데스매치가 더는 즐겁지 않게 된 거예요. 형광등 같은 게 없어도 좋은 데스매치를 할 수 있죠. 어차피 그건 곧 사라지겠지만요……. 이제 [형광등을] 생산하지 않으니까.

“솔직히 저는, 제가 영원히 아키라를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했을 시절 당신은 미국에 있었고, 나는 한국에 있었으니까.”

“삶이란 참 재밌는 법이죠.”

앞으론 온몸이 다 찢어지지 않은 채로 집에 가서 강아지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나에게 데스매치로 돌아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를 전혀 모르고 하는 소리죠.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고 싶고, 가족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결국 모든 것에는 끝이 찾아오고, 우리는 모두 잊혀지고, 모든 건 모래로 돌아가는데, 남는 의미는 사랑할 수 있는 가족 뿐이지 않겠어요. 해피엔딩을 원해요.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간절하게 해피엔딩을 원해요.